에른스트 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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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른스트 룀은 1887년 뮌헨에서 태어난 독일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종전 후 자유 군단에 가입한 그는 나치당에 합류하여 아돌프 히틀러와 친분을 쌓았으며, 뮌헨 폭동에 가담했다가 군에서 불명예 제대되었다. 이후 볼리비아에서 군사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30년 돌격대(SA) 참모장이 되어 SA의 급진적 성향을 강화했다. 룀은 히틀러와 SA의 관계, SA의 사회주의적 성향, 그리고 그의 동성애적 성향으로 인해 히틀러와 갈등을 겪었고, 결국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으로 숙청되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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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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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출생 이름 | 에른스트 율리우스 귄터 룀 |
출생일 | 1887년 11월 28일 |
출생지 | 뮌헨, 바이에른 왕국, 독일 제국 |
사망일 | 1934년 7월 1일 |
사망 장소 | 슈타델하임 교도소, 뮌헨, 뮌헨-오버바이에른 대관구, 나치 독일 |
사망 원인 | 총살형 |
안장 장소 | 베스트프리트호프, 뮌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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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Ernst Julius Gunther Röhm |
군사 경력 | |
소속 | 독일 제국 육군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 볼리비아 육군 돌격대 |
복무 기간 | 1906년–1923년 |
최종 계급 | 대위 중령 (볼리비아) 돌격대 참모장 |
참전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
훈장 | 철십자 훈장 1급 |
정치 경력 | |
정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NSDAP) |
기타 정당 | 독일 노동자당 |
돌격대 직책 | 돌격대 참모장 |
돌격대 참모장 임기 시작 | 1931년 1월 5일 |
돌격대 참모장 임기 종료 | 1934년 7월 1일 |
돌격대 최고 지도자 | 아돌프 히틀러 (돌격대 최고 지도자) |
돌격대 참모장 전임자 | 오토 바게너 |
돌격대 참모장 후임자 | 빅토르 루체 |
국가 지도자 직책 | 국가지도자 |
국가 지도자 임기 시작 | 1933년 6월 2일 |
국가 지도자 임기 종료 | 1934년 7월 1일 |
국회의원 직책 | 독일국 국회의원 |
국회의원 당선 횟수 | 2회 |
국회의원 임기 시작 | 1924년 5월 4일 |
국회의원 임기 종료 | 1924년 10월 20일 |
국회의원 임기 시작 | 1933년 11월 12일 |
국회의원 임기 종료 | 1934년 7월 1일 |
국회의장 | 파울 뢰베, 헤르만 괴링 |
무임소 장관 직책 | 무임소 장관 |
무임소 장관 임기 시작 | 1933년 12월 1일 |
무임소 장관 임기 종료 | 1934년 7월 3일 |
국가 원수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기타 정보 | |
2. 초기 이력
룀은 뮌헨에서 태어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 독일 제국 바이에른 군의 중위로 참전하였다. 로렌에서 부상을 입어 얼굴에 큰 흉터를 가지게 되었다. 전투에서의 용맹으로 대위로 진급하고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1]
1918년 11월 11일 휴전 이후 룀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유 군단에 가입하였고, 이후 나치당(당시 이름은 독일 노동자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공산당 조직인 "붉은 전선"과 싸웠고, 유대인에게 테러를 가했으며, 이 과정에서 히틀러를 만나 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료가 되었다.
1923년 11월,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모방하여 맥주 홀 폭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1924년 2월, 룀과 히틀러, 루덴도르프 장군은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룀은 유죄 판결을 받고 독일 국방군에서 불명예 제대 처분을 받았으며, 1년 3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나 재판 직후 준법 서약을 하고 석방되었다. 히틀러도 5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실제로는 9개월만 복역하였다.
1924년, 히틀러가 복역 중일 때 룀은 불법화된 SA를 대신하여 프론트반(Frontbann)을 합법 조직으로 만들었다. 나치당은 "민족 사회주의 자유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선거에 나섰고, 룀은 의회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정쟁으로 인해 의원직을 사임하고 볼리비아로 망명하여 군사 고문직을 역임하였다.
2. 1. 출생과 성장
1887년 11월 28일, 에른스트 룀은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 뮌헨에서 바이에른 왕립 철도 관리관이었던 아버지 율리우스 룀과 어머니 소피아 에밀리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룀 가문은 바이에른의 명문가였지만,[2] 봉급이 많지는 않았다.[1]룀은 1906년 뮌헨의 맥시밀리안 김나지움(Maximiliansgymnasium München)을 졸업하고, 바이에른 왕국 육군 제10보병연대 "루트비히 황태자"에 입대했다. 1907년 사관후보생 시험에 합격하여 뮌헨 사관학교에서 수학하고, 1908년 3월 소위로 임관했다.[1] 그는 가족에게 군사 전통이 없었음에도, 잉골슈타트(Ingolstadt)에서 10사단 "루트비히 왕"(King Ludwig)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다.[3]
2. 2. 군 입대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룀은 뮌헨에서 태어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 독일 제국 바이에른 군의 중위로 참전했다. 로렌에서 부상을 입어 얼굴에 큰 흉터를 갖게 되었다. 전투에서의 용맹으로 대위로 진급하고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1]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제10 보병 연대 König의 제1대대 부관이었다. 그 다음 달, 로렌의 샤노 숲에서 얼굴에 심한 부상을 입었고, 평생 흉터를 지니고 살았다. 1915년 4월 소위(Oberleutnantde)로 진급했다. 1916년 6월 23일 베르됭의 티오몽 요새 공격 중 심각한 가슴 부상을 입었고, 전쟁의 나머지 기간을 프랑스와 루마니아에서 참모 장교로 보냈다. 그는 베르됭에서 부상을 입기 전에 철십자 1급을 수여받았고, 1917년 4월 대위(Hauptmannde)로 진급했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 이후, 룀은 Reichswehrde에서 대위로 군 경력을 계속했다. 1919년 4월 오어드루프에서 결성된 프란츠 폰 에프 대령이 이끄는 "에프 의용군"의 고위 간부 중 한 명이었으며, 1919년 5월 3일 무력으로 뮌헨 소비에트 공화국을 전복시켰다.
레임은 바이에른 왕국 제10 야전포병연대(Königlich Bayerisches 10. Feldartillerie-Regiment)에 배속되었고, 서부전선에 참전했다. 대전 중 레임은 세 차례나 중상을 입었다. 개전 다음 달 국경의 로렌 지방에서 얼굴에 총탄을 맞아,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콧날이 깎이고 뺨이 크게 파이는 중상을 입었다. 1916년 6월 베르됭 요새의 티오몽 요새(Ouvrage de Thiaumont) 공방전에 참가하여 가슴에 중상을 입고 예비군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 후인 1916년 10월부터 바이에른 전쟁성(Bayerisches Kriegsministerium)에 근무했다.
1917년 5월부터 전선에 복귀하여, 1918년 5월까지 제12 바이에른 사단(12. Königlich Bayerische Division)의 장관 부관(Ordonnanzoffizier) 겸 보급 장교(nachschuboffizier)로 루마니아와 프랑스에서 싸웠다. 1918년 5월부터는 같은 사단의 제2 참모 장교로 근무했다. 10월에 스페인 독감에 걸려 한때 생존이 위태로웠으나, 간신히 회복된 상태에서 11월의 종전을 맞이했다.
종전 당시 계급은 육군 대위였다. 또한 전공으로 1급 철십자장, 2급 철십자장, 전상장 은장 등을 수여받았다.
종전 후, 1919년 1월부터 3월까지 인골슈타트의 바이에른 제11보병여단(11. Königlich Bayerische Infanterie-Brigade)에서 부관이 되었다. 이어 1919년 5월부터 7월까지 뮌헨 총사령부(Stadtkommandantur München)의 정치보안부에서 참모장을 역임했다.
1919년 4월, 뮌헨에서 붉은 혁명이 발생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요하네스 호프만 정권은 밤베르크로 쫓겨났고, 소련 적화 공작원과 독일 공산당에 의해 사회주의 정권인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4월 14일, 호프만 정권은 레테 공화국의 무력 토벌을 결정하고, 바이에른 주민들에게 의용군을 결성하여 레테 공화국과 싸울 것을 촉구했다. 이 호소에 따라 바이에른에서는 프란츠 폰 에프 대령이 이끄는 "에프 의용군", 투레 협회가 조직한 "오버란트 의용군", 바이에른 주립 산림 감독관 게오르크 에셰리히가 이끄는 "향토군(Einwohnerwehr)" 등이 잇따라 편성되었다.
룀 또한 의용군에 참가하기 위해 뮌헨을 떠나 오어드루프로 이동하여, 그곳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에프 의용군에 참가하여 폰 에프 대령으로부터 장비와 병참을 맡았다. 그는 여기서 뛰어난 조직 능력을 발휘했고, 이후 의용군의 조직이 군에서 그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에프 의용군을 포함한 정부군 6만 명은 5월 1일부터 3일까지 뮌헨을 공격하여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3.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룀은 자유 군단에 가입하고, 나치당(당시 독일 노동자당)에 합류하여 공산주의 조직 및 유대인에 대한 테러 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절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료가 되었다.[1]
1923년 맥주 홀 폭동이 실패한 후, 룀은 독일 국방군에서 불명예 제대 처분을 받고 1년 3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나, 재판 직후 준법 서약을 하고 석방되었다. 히틀러 또한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9개월 만에 복역을 마쳤다.
히틀러가 복역 중일 때, 룀은 불법화된 돌격대(SA)를 대신하여 합법 조직인 전선대를 조직했다. 이후 민족사회주의 자유당 소속으로 의회에 진출했으나, 정쟁으로 인해 의원직을 사임하고 볼리비아로 망명하여 군사 고문직을 역임했다.
3. 1. 자유 군단과 나치당 가입
룀은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유 군단에 가입하였다. 프란츠 리터 폰 에프가 이끄는 자유 군단에서 뛰어난 조직 능력을 발휘했다. 1919년 나치당(당시 이름은 독일 노동자당)에 가입했으며, 당원 번호는 623번이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정치적 동맹이자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룀은 나치당 내에서 우익 준군사 조직과 Reichswehrde 사이의 중요한 중개자 역할을 했으며, 프란츠 리터 폰 에프를 나치당에 가입하도록 설득하여 당의 재정 확보에 기여하기도 했다.1923년 초, 룀은 군대 강화 및 마르크스주의 영향에 맞서기 위한 준군사 조직 연맹 설립에 참여했다. 같은 해 9월에는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독일의 날" 기념식에서 우익 급진 그룹, 재향군인 협회 및 기타 준군사 부대를 모으는 데 기여했다.
1923년 9월 26일, 룀은 Reichswehrde에서 제대하고 히틀러의 베를린 진군 계획에 합류했다. 그는 1923년 11월 맥주 홀 폭동에 참여하여 Reichskriegsflaggede 민병대를 이끌고 전쟁부를 점령했으나, 폭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룀은 체포되어 1년 3개월 형을 선고받았지만 곧 가석방되었다.

히틀러가 수감된 동안, 룀은 불법화된 돌격대(SA)를 대신할 전선대를 합법 조직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룀의 조직 운영 방식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다. 1925년 4월, 룀은 히틀러와 루덴도르프가 자신의 제안을 승인하지 않자 모든 정치 및 군대에서 사임하고 은퇴했다.
3. 2. 뮌헨 폭동과 투옥
1923년 11월, 룀은 뮌헨 폭동(맥주홀 폭동) 당시 Reichskriegsflaggede 민병대를 이끌었다.[1] 그는 뢰벤브로이켈러를 임대하여 혁명을 시작하고, 자신의 부대를 이용해 비밀 은닉처에서 무기를 확보하여 시 중심부의 중요 지점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명령이 내려오자 그는 뢰벤브로이켈러에 모인 사람들에게 카르 정부가 축출되었고 히틀러가 "국가 혁명"을 선포했다고 발표했고, 열렬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런 다음 룀은 거의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전쟁부로 진격하여 16시간 동안 점령했다. Reichswehrde 본부를 장악한 후, 룀은 안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소식을 기다렸다. 그 후 히틀러, 헤르만 괴링,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 깃발을 높이 휘날리며 시 중심부로 진격한 것은 표면적으로 룀과 그의 부대를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다.군중이 환호하고,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Heil"de을 외치며 선동하는 가운데, 붉은 완장을 찬 히틀러의 무장 집단은 폭동에 대응할 준비가 된 바이에른 주 경찰을 만났다. 행진자들이 시 중심부 근처의 펠트헤르할레에 도착했을 무렵, 총격이 시작되어 참가자들을 흩어지게 했다. 총격이 끝날 무렵, 나치 14명과 경찰 4명이 사망했고, 폭동은 실패했으며 나치의 첫 번째 권력 장악 시도는 24시간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

1924년 2월, 폭동 실패 후 룀, 히틀러, 루덴도르프, 헤르만 크리벨 중령 및 기타 6명은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룀은 유죄 판결을 받고 15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히틀러는 유죄 판결을 받고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9개월만 복역했다.
1924년 4월, 룀은 제국 의회의 민족주의 (인종-국가) 국가사회주의 자유당 의원이 되었다. 그는 크리벨 석방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번 했다. 1924년 12월 선거에서 그의 당이 얻은 의석은 크게 줄었고, 그의 이름은 목록에서 너무 밑에 있어서 제국 의회로 돌아가지 못했다. 히틀러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룀은 당시 불법화된 돌격대(SA)의 합법적 대안으로 전선대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히틀러는 이 조직에 대한 룀의 야심 찬 계획을 완전히 지지하지 않았고, 이는 문제가 되었다. 히틀러는 'Bund Wiking', 'Bund Bayern und Reich', 'Blücherbund'와 같은 경쟁 집단이 모두 회원 자격을 다투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준군사 조직을 불신했고, 폭동 실패를 통해 경찰과 Reichswehr가 정부에 충성하는 한 이러한 집단을 합법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1925년 4월 히틀러와 루덴도르프가 룀이 3만 명의 전선대를 SA에 통합할 준비가 된 제안을 승인하지 않자, 룀은 1925년 5월 1일 모든 정치 집단과 군대에서 사임했다. 그는 당 지도부가 따르고자 하는 "합법적인" 길에 대해 큰 경멸감을 느꼈고, 공직에서 물러나 은퇴를 추구했다.
3. 3. 나치당 내 활동과 볼리비아 망명
룀은 뮌헨에서 태어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로렌에서 부상으로 얼굴에 큰 흉터를 입었지만, 용맹함으로 철십자 훈장을 받고 대위로 승진했다.[1]전쟁 후 룀은 자유 군단과 나치에 가입하여 공산주의자들과 유대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이때 히틀러를 만나 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료가 되었다.
1923년 맥주 홀 폭동 실패 후, 룀은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곧 석방되었다. 히틀러가 복역하는 동안 룀은 불법화된 돌격대(SA)를 대신하여 전선대를 조직하고, 국가사회주의 자유당 소속으로 의회에 진출했으나, 정쟁으로 사임하고 볼리비아로 망명하여 군사고문으로 활동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 체결로 독일 육군 병력은 10만 명으로 제한되었고, 중화기 등의 소지가 금지되었다. 이에 따라 민간 준군사 조직 육성이 중요해졌고, 룀은 이 임무를 활발히 수행했다.[2] 1919년 7월, 룀은 제7군 장교들의 정치 단체 "아이제르네 파우스트(Eiserne Faust)" 창설에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3][2] 이 단체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상관 카를 마이어 대위도 참여했는데, 이를 계기로 히틀러와 룀은 만나게 되었다.[2] 1920년 1월, 룀은 독일 노동자당(DAP)에 입당했고(당원 번호 623),[3] DAP는 곧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개편되었다.
1924년 2월, 뮌헨 폭동 실패 후 룀은 히틀러 등과 함께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룀은 15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히틀러는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9개월만 복역했다. 1924년 4월, 룀은 제국 의회 의원이 되었으나, 12월 선거에서 낙선했다. 히틀러 수감 중 룀은 돌격대의 대안 조직 전선대를 만들었으나, 히틀러는 룀의 계획을 পুরোপুরি 지지하지 않았다.
1925년 4월, 히틀러와 루덴도르프가 룀의 제안을 거부하자, 룀은 1925년 5월 1일 모든 정치 및 군대에서 사임하고 은퇴했다.
1928년, 룀은 볼리비아 육군의 고문으로 영입되었다. 1929년 1월 라파스에 도착하여 볼리비아 군사학교 교수로 시작하여, 부대 감찰관, 오루로에 본부를 둔 볼리비아 육군 사단 사령부 참모장 등을 역임했다.
4. 돌격대(SA) 지도자
1923년 11월, 룀은 뮌헨 맥주홀 폭동 당시 Reichskriegsflaggede 민병대를 이끌었다.[2] 그는 뢰벤브로이켈러의 넓은 메인 홀을 임대하여 재회와 축제를 열었고, 히틀러와 그의 일행은 비르거브로이켈러에 있었다.[3] 룀은 혁명을 시작하고, 자신의 부대를 이용하여 비밀 은닉처에서 무기를 확보하여 시 중심부의 중요 지점을 점령할 계획이었다.[4] 명령이 내려오자 그는 뢰벤브로이켈러에 모인 사람들에게 카르 정부가 축출되었고 히틀러가 "국가 혁명"을 선포했다고 발표했고, 열렬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룀은 প্রায়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전쟁부로 진격하여[4] 16시간 동안 점령했다.[2] Reichswehrde 본부를 장악한 후, 룀은 안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소식을 기다렸다.[3] 그 후 히틀러, 헤르만 괴링,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 깃발을 높이 휘날리며 시 중심부로 진격한 것은 표면적으로 룀과 그의 부대를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다.[3]
군중이 환호하고,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Heil"de을 외치며 선동하는 가운데, 붉은 완장을 찬 히틀러의 무장 집단은 폭동에 대응할 준비가 된 바이에른 주 경찰을 만났다.[3] 행진자들이 시 중심부 근처의 ''펠트헤르할레''에 도착했을 무렵, 총격이 시작되어 참가자들을 흩어지게 했다. 총격이 끝날 무렵, 나치 14명과 경찰 4명이 사망했고, 폭동은 실패했으며 나치의 첫 번째 권력 장악 시도는 24시간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3]
1924년 2월, 폭동 실패 후 룀, 히틀러, 루덴도르프, 헤르만 크리벨 중령 및 기타 6명은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룀은 유죄 판결을 받고 15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7] 히틀러는 유죄 판결을 받고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9개월만 복역했다.[11]
1924년 4월, 룀은 ''제국 의회''의 ''민족주의''(인종-국가) 국가사회주의 자유당 의원이 되었다.[12] 그는 크리벨 석방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번 했다. 1924년 12월 선거에서 그의 당이 얻은 의석은 크게 줄었고, 그의 이름은 목록에서 너무 밑에 있어서 제국 의회로 돌아가지 못했다. 히틀러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룀은 당시 불법화된 ''돌격대''(SA)의 합법적 대안으로 ''전선대''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히틀러는 이 조직에 대한 룀의 야심 찬 계획을 완전히 지지하지 않았고, 이는 문제가 되었다. 히틀러는 ''Bund Wiking'', ''Bund Bayern und Reich'', ''Blücherbund''와 같은 경쟁 집단이 모두 회원 자격을 다투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준군사 조직을 불신했고, 폭동 실패를 통해 경찰과 Reichswehrde가 정부에 충성하는 한 이러한 집단을 합법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12]
1925년 4월 히틀러와 루덴도르프가 룀이 3만 명의 ''전선대''를 SA에 통합할 준비가 된 제안을 승인하지 않자, 룀은 1925년 5월 1일 모든 정치 집단과 군대에서 사임했다. 그는 당 지도부가 따르고자 하는 "합법적인" 길에 대해 큰 경멸감을 느꼈고, 공직에서 물러나 은퇴를 추구했다.[7]
4. 1. 돌격대 참모장 복귀와 급진화
1930년 9월, 슈테네스 반란의 결과로 히틀러는 '최고 SA지도자'(Oberster SA-Führer) 계급으로 SA를 장악하였다. 히틀러는 룀에게 SA 참모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룀은 1931년 1월 5일 이 직책을 맡았다.[5][6] 룀은 급진적인 사상을 SA에 주입하였고, 자신의 측근들을 지휘부에 앉혔다.당시 SA는 백만 명에 이르렀으며, 전통적으로 맡았던 당인사 경호 임무는 SS에게 넘겨줬으나, 공산주의자와 패싸움을 하거나 유대인을 공격하는 것은 이들의 임무였다. SA는 나치에 적대적인 모든 세력을 공격했고, 특히 나치에 반대하는 학자, 언론인, 사업가, 공무원들도 이들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졌던 룀의 아래에서 SA는 자주 노동쟁의에 개입하여 파업에서 노동자 편을 들거나, 또는 자본가의 편을 드는 구사대(求社隊)와 싸웠다. 이러한 행동으로 좌파 정당(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지지 기반을 잠식하고 나치의 지지를 넓혔다. 그러나 이런 과격한 유사 사회주의 성향, 무분별한 폭력, 그리고 과도한 음주는 후에 보수 세력의 우려를 자아내어 나치 집권에 짐이 되었다.
또 문제가 되었던 것은 룀과 다른 SA 지도자들의 동성애적 경향이었다. 1931년 뮌헨 포스트는 룀의 편지를 입수하여 그의 동성애적 경향을 폭로하였고, 이는 국가적 스캔들로 비화하였다.
히틀러와 룀은 서로 대화할 때 "du"(du는 친밀한 사이를 뜻하며, 보통 높은 사람이거나 대통령직을 가진 사람에게는 독일에서 sie를 사용한다. 룀과 히틀러는 친밀한 사이임을 뒷받침한다.)를 사용하였으며, 룀을 제외하면 괴링과 괴벨스만이 히틀러와 이런 식으로 대화했다. 또한 룀은 히틀러를 부를 때 친구처럼 이름을 직접 불러 "아돌프"라고 호칭한 반면, 다른 자들은 주로 "mein Führerde" (총통 각하)라고 불렀다.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SA는 법적으로 경찰 보조원으로 승격되었으며, SA는 지방 관청에 들이닥쳐 지방행정을 나치에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

4. 2. SA의 활동과 사회적 영향
1930년 9월, "슈테네스 반란"의 결과로 히틀러는 "고급 SA지도자"(Oberster SA-Führer) 계급으로 SA를 장악하였다. 히틀러는 룀을 "SA 참모장"으로 불러들였고, 1931년 1월 이를 맡았다. 룀은 급진적인 사상을 SA에 주입하였고, 자신의 측근들을 지휘부에 앉혔다.[5][6]SA는 이 당시 백만 명에 이르렀으며, 전통적으로 맡았던 당 인사 경호 임무는 SS에게 넘겨줬으나, 공산주의자와 패싸움을 하거나 유대인을 공격하는 것은 이들의 임무였다. SA는 나치에 적대적인 모든 세력을 공격했고, 특히 나치에 반대하는 학자, 언론인, 사업가, 공무원들도 이들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8][9]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졌던 룀의 아래에서 SA는 자주 노동쟁의에 개입하여 파업에서 노동자 편을 들거나, 또는 자본가의 편을 드는 구사대(求社隊)와 싸웠다. 이러한 행동으로 좌파 정당-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지지 기반을 잠식하고 나치의 지지를 넓혔다. 그러나 이런 과격한 유사-사회주의 성향, 무분별한 폭력, 그리고 과도한 음주는 후에 보수 세력의 우려를 자아내어 나치 집권에 짐이 되었다.[10]
또 문제가 되었던 것은 룀과 다른 SA 지도자들의 동성애적 경향이었다. 1931년 "뮌헨 포스트"는 룀의 편지를 입수하여 그의 동성애적 경향을 폭로하였고, 이는 국가적 스캔들로 비화하였다.
히틀러와 룀은 서로 대화할 때 "du"(du는 친밀한 사이를 뜻하며, 보통 높은 사람이거나 대통령직을 가진 사람에게는 독일에서 sie를 사용한다. 룀과 히틀러는 친밀한 사이임을 뒷받침한다.)를 사용하였으며, 룀을 제외하면 괴링과 괴벨스만이 히틀러와 이런 식으로 대화했다. 또한 룀은 히틀러를 부를 때 친구처럼 이름을 직접 불러 "아돌프"라고 호칭한 반면, 다른 자들은 주로 "mein Führer"(총통 각하)라고 불렀다.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SA는 법적으로 경찰 보조원으로 승격되었으며, SA는 지방 관청에 들이닥쳐 지방 행정을 나치에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
4. 3. 히틀러와의 관계
룀은 히틀러와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서로 대화할 때 "du"(친밀한 사이에서 사용하는 표현)를 사용했으며, 룀을 제외하면 괴링과 괴벨스만이 히틀러와 이런 식으로 대화했다. 또한 룀은 히틀러를 친구처럼 "아돌프"라고 불렀지만, 다른 사람들은 주로 "mein Führer"(총통 각하)라고 불렀다.[1]1930년 9월, 슈테네스 반란 이후 히틀러는 "고급 SA지도자"(Oberster SA-Führer) 계급으로 SA를 장악하였다. 히틀러는 룀을 "SA 참모장"으로 불러들였고, 1931년 1월 룀은 이 직책을 맡았다. 룀은 SA에 급진적인 사상을 주입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지휘부에 앉혔다.
1933년 히틀러 집권 당시, SA는 법적으로 경찰 보조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지방 관청에 들이닥쳐 지방행정을 나치에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

5. 나치 집권 이후
에른스트 룀과 돌격대는 자신들을 "국가 사회주의 혁명"의 선봉대로 여겼지만, 히틀러는 권력을 잡은 후에는 더 이상 돌격대의 거리 싸움 능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룀에게 여러 요직을 맡겼는데, 1933년 6월 2일 라익슬라이터, 9월 14일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10월 3일 독일 법률 아카데미 회원, 11월 12일 독일 국회 의원, 12월 2일 무임소장관으로 임명했다.
룀은 나치 내 사회주의 분파의 주요 인물로, "사회주의적인(Sozialistische)", "노동자(Arbeiter)"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며 "제2의 혁명"을 주장했다. 이는 히틀러를 지원한 자본가들에게 위협이었고, 히틀러는 "제2의 혁명"은 없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돌격대원 대부분은 노동계급 출신으로 사회주의 정책을 원했고, 룀은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룀은 300만 명의 돌격대를 독일 국방군을 대체하는 새로운 독일 정규군으로 만들려 했다. 그는 국방장관이 되어 독일 국방군을 돌격대에 합병하여 "진정한 인민의 군대"를 구성하려 했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의 역사를 가진 독일 국방군 지휘부를 경악하게 했다. 독일 국방군은 돌격대를 오합지졸로 여겼고, 돌격대 지휘부의 동성애 성향을 혐오했다.
히틀러는 군부의 지지가 필요했고, 돌격대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룀은 이에 항의하며 돌격대의 무장력을 증대시켰다. 1934년 3월, 룀은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군부는 거부했다.
1934년 4월 11일, 히틀러는 군부 고위직들과 만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사망 후의 방안을 논의했다. 히틀러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조건으로 돌격대를 축소하고 룀의 야망을 억누르며, 국방군을 유일한 무장조직으로 만들고 군비를 확장할 것을 약속했다. 1934년 6월,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히틀러에게 계엄령 선포 가능성을 통보했고, 힌덴부르크의 최후통첩은 히틀러의 축출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히틀러는 룀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5. 1. 제2의 혁명 주장
에른스트 룀과 다른 돌격대 지휘관들은 자신들을 "민족 사회주의 혁명"의 선봉대로 여겼다. 히틀러 집권 후, 이들은 독일 사회의 급진적 변화를 기대했지만, 총리가 된 히틀러는 더 이상 돌격대의 거리 싸움 능력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7]룀은 나치 내 사회주의 분파의 주요 인물로, "사회주의적인(Sozialistische)", "노동자(Arbeiter)"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이들은 유대인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산업 국유화와 노동자 지배를 선호했으며, 제국 시절 귀족들의 자산을 몰수하여 재분배하기를 원했다. 룀은 "반동세력"에 맞서 "제2의 혁명"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히틀러 집권을 도운 자본가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히틀러는 자본가들에게 "제2의 혁명"은 없을 것이라고 확언하며 안심시켰다. 돌격대원 대부분은 노동계급 출신으로 사회주의 정책을 원했다. 이들은 "스테이크"(밖은 갈색-나치의 상징색-이었지만, 속은 붉은 색)라고 불렸으며, 전직 공산주의자가 많았다. 이들은 사회주의 정책을 실행하지 않고 돌격대에 보답하지 않는 히틀러에게 실망했고, 룀은 공개적으로 히틀러를 비판하기도 했다.
나치당 내 급진파는 반자본주의적 성향의 "제2의 혁명"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26] 이들은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독과점을 억제하며 토지와 산업의 국유화를 촉진하려 했다.[26] 이러한 계획은 히틀러의 기업 재정 후원자들에게 위협이 되었고, 히틀러는 산업계 동맹국들에게 혁명은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많은 돌격대원들은 노동계급 출신으로 독일 사회의 급진적 변혁을 갈망했다. 이들은 새 정권의 사회주의적 방향 부족과 기대했던 후원을 제공하지 못한 것에 실망했다.
돌격대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룀도 히틀러의 혁명 종식 선언에 저항했다. 1933년 9월 1일, 룀은 바이에른의 돌격대 최고 지도부 특별 위원회 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주 정부와 군 정부에 돌격대 특별 위임관을 두어 지방 행정 기관을 제2혁명으로 이끌려 했다. 10월에는 괴링이 지배하는 프로이센 주에도 돌격대 특별 전권관 설치를 허용하게 했다. 각 주들도 프로이센 주를 따라 돌격대 특별 전권관 설치를 허용했고, 결과적으로 행정 간섭과 명령 불복종이 만연하여 히틀러 정권 붕괴 소문이 돌았다.[23]
국제 연맹 탈퇴로 재군비 문제가 주목받자, 룀은 1934년 1월 15일 돌격대 특별 전권관의 임무를 "반국가적 음모와의 투쟁"으로 제한하는 등 양보했지만, 돌격대를 독일 정규군으로 만들려는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돌격대를 정규군으로 만들면 대원들의 실업 문제가 개선되고 혁명을 일으킬 필요가 없어지므로, 룀은 제2혁명보다 돌격대 정규군화에 힘을 쏟았다.[29]
5. 2. 히틀러와의 갈등 및 군부와의 대립
룀은 나치 내에서 사회주의적 분파의 주요 인물로, "제2의 혁명"을 통해 "반동세력"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히틀러를 지원한 자본가들에게 위협이었고, 히틀러는 그들에게 "제2의 혁명"은 없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돌격대(SA) 대원 대부분은 노동계급 출신으로 사회주의 정책을 원했고, 히틀러에게 실망한 룀은 공개적으로 히틀러를 비판하기도 했다.[22]룀과 SA 지휘관들은 300만 명의 SA를 독일 국방군을 대체하는 새로운 독일 정규군으로 만들려 했다. 그들은 독일 국방군 지휘부를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로 여겼고, 룀은 국방장관이 되어 독일 국방군을 SA에 합병하려 했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의 역사를 가진 독일 국방군 지휘부를 경악하게 했다. 독일 국방군은 SA를 오합지졸로 여겼고, SA 지휘부의 동성애 성향을 혐오했다. SA와 독일 국방군의 갈등은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히틀러는 군부의 지지가 필요했고, SA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룀은 이에 항의하며 SA의 무장력을 증대시켰고, 이는 SA가 반란을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1934년 3월, 룀은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군부는 거부했다.
1934년 4월 11일, 히틀러는 군부 고위직들과 만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사망 후의 방안을 논의했다. 히틀러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조건으로 SA를 축소하고 룀의 야망을 억누르며, 국방군을 유일한 무장조직으로 만들고 군비를 확장할 것을 약속했다.
1934년 6월,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히틀러에게 SA와 군부의 긴장이 해소되지 않으면 힌덴부르크가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힌덴부르크의 최후통첩은 히틀러의 축출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히틀러는 룀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1930년 9월, 베를린에서 발생한 슈테네스 반란의 결과로 히틀러는 SA의 최고 사령관직을 맡았다. 그는 뢰름에게 SA 참모총장으로 복귀해 줄 것을 부탁했고, 뢰름은 1931년 1월 5일 새로운 임무를 시작했다. 뢰름은 SA에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도입하고 측근들을 고위 지도부에 임명했다. 이전에는 SA 부대가 각 가우(Gau)의 나치당 지도부에 종속되어 있었으나, 뢰름은 새로운 그룹페(Gruppe)를 설립하여 지역 나치당의 감독을 받지 않도록 했다. 각 그룹페는 여러 지역에 걸쳐 있었고, SA 그룹펜퓌러(Gruppenführer)가 지휘했으며, 그들은 오직 뢰름이나 히틀러에게만 보고했다.
이 무렵 SA는 100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게 되었다. SA는 공산주의자들, 경쟁 정당 세력들과의 거리 싸움과 유대인, 나치의 목표에 적대적인 사람들에 대한 폭력 행위를 계속했다.
뢰름의 지휘 아래 SA는 파업 및 기타 노동 분쟁에서 종종 노동자들의 편을 들었고, 파업 파괴자들을 공격하고 피케팅을 지지했다. SA의 협박은 나치의 부상과 선거 운동 중 경쟁 정당의 폭력적인 탄압에 기여했지만, 거리 폭력과 잦은 음주로 악명이 높았고, 뢰름과 그의 부관인 에드문트 하이네스 등 SA 지도자들의 소문난 동성애는 걸림돌이었다. 1931년 6월, 뮌헨 포스트는 SA 내의 동성애 문제를 거론하며 뢰름과 SA를 공격했고, 1932년 3월에는 뢰름의 사적인 편지를 입수하여 발표했는데, 그 편지에서 뢰름은 자신을 "동성애적 성향"(gleichgeschlechtlich)이라고 묘사했다.
히틀러는 뢰름의 동성애를 알고 있었고, 뢰름은 히틀러와 "du"(친밀한 "너")를 사용할 수 있는 소수의 친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뢰름은 히틀러를 "아돌프" 또는 "아디"라고 부르는 유일한 나치 지도자였다. 그들의 긴밀한 관계는 아돌프 히틀러의 성적 취향에 대한 소문으로 이어졌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면서 SA 대원들은 보조 경찰로 임명되었고, "모든 국가의 적"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뢰름과 돌격대(SA)는 자신들을 "국가 사회주의 혁명"의 선봉대로 여겼지만, 히틀러는 더 이상 그들의 거리 싸움 능력이 필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뢰름을 여러 중요한 당직과 국가 직책에 임명했다. 1933년 6월 2일, 히틀러는 그를 라익슬라이터로 임명했다. 그는 9월 14일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이 되었고, 10월 3일에는 독일 법률 아카데미 회원이 되어 11월에는 지도위원회 (''Führerrat'')로 승진했다. 11월 12일, 뢰름은 라익스타크에 선출되었다. 1933년 12월 2일, 그는 라익스미니스터로 라익 내각에 임명되었다. 동시에 그는 라익 국방위원회 위원도 되었다.
나치당 내 더 급진적인 파벌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뢰름은 공개적으로 반자본주의적 성향을 가진 "제2의 혁명"을 주장했다. 이러한 급진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독과점을 억제하며 토지와 산업의 국유화를 촉진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의향이 있었다. 이러한 계획들은 히틀러의 기업 재정 후원자들에게 위협이 되었고, 히틀러는 혁명은 없을 것이라고 그의 산업계 동맹국들에게 안심시켰다.
많은 돌격대 "돌격대원"들은 노동계급 출신이었고 독일 사회의 급진적인 변혁을 갈망했다. 그들은 새로운 정권의 사회주의적 방향 부족과 풍부한 후원을 제공하지 못한 것에 실망했다. 또한, 뢰름과 그의 돌격대 동료들은 그들의 부대를 미래 독일군의 핵심으로 생각했고, 라이히스베어와 기존의 전문 장교단을 대체하는 것으로 자신들을 보았다. 그 당시 돌격대는 300만 명이 넘는 병력으로 팽창하여,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0만 명으로 제한된 ''라이히스베어''를 압도했다. 뢰름은 장교단의 일원이었지만, 그들을 "혁명적 정신"이 부족한 "구식"으로 여겼다. 그는 ''라이히스베어''가 그의 지휘 아래 진정한 "인민군"을 형성하기 위해 돌격대에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는 군부 내부에 상당한 불안감을 야기했고 그들에게 돌격대가 심각한 위협이라는 것을 확신시켰다. 1934년 2월 내각 회의에서 뢰름은 국방장관으로서 그의 지휘 아래 합병을 요구했다.

이는 프리드리히 2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가진 군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군 장교단은 돌격대를 "싸움을 좋아하는" 거리 깡패들의 "훈련되지 않은 폭도"로 여겼고, 돌격대 내부의 "타락한 도덕"의 만연에도 우려했다. 돌격대원들의 손에 많은 무기가 있다는 보고서는 군 지도부에게 추가적인 우려를 야기했다. 장교단은 뢰름의 제안에 반대했고, 돌격대가 통제권을 얻으면 규율과 명예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뢰름과 돌격대는 그보다 적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군 지도부는 히틀러와 협력하기를 열망했다.
1934년 2월, 히틀러는 영국 외교관 앤서니 이든에게 돌격대를 3분의 2로 감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같은 달, 히틀러는 돌격대가 몇 가지 사소한 군사 기능만 남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뢰름은 불만을 제기하며 돌격대의 무장 요소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돌격대가 히틀러에 대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추측이 베를린에 널리 퍼졌다. 3월에 뢰름은 "단지" 수천 명의 돌격대 지도자만 군대에 편입될 것이라는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군대는 즉시 그 아이디어를 거부했다.
1934년 4월 11일, 히틀러는 도이칠란트에서 독일 군 지도자들과 만났다. 히틀러는 군부 지도부에게 힌덴부르크의 건강 악화를 알리고 ''라이히스베어''가 힌덴부르크의 후계자로 그를 지지할 것을 제안했다. 대신 그는 돌격대를 감축하고 뢰름의 야망을 억누르고 ''라이히스베어''가 독일의 유일한 군사력이 될 것이라고 보장했다. 윌리엄 엘 시러에 따르면, 히틀러는 또한 군대와 해군을 확장할 것을 약속했다.
돌격대의 권력을 억제할 결심을 했지만, 히틀러는 오랜 동맹을 없애는 것을 미루었다. 당 내에서 정치적 투쟁이 커졌고, 프로이센 총리 헤르만 괴링,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 그리고 SS 라익스퓌러 하인리히 힘러를 포함한 히틀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뢰름에 맞서 자리를 잡았다. 뢰름을 고립시키기 위해 1934년 4월 20일, 괴링은 프로이센 정치경찰(게슈타포)의 통제권을 힘러에게 이양했는데, 그는 힘러가 뢰름에 대항할 것이라고 믿었다.
''라이히스베어''와 보수적인 기업계 모두 힌덴부르크에게 돌격대에 대해 계속 불만을 제기했다. 6월 초,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힌덴부르크로부터 히틀러에게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히틀러가 독일의 증가하는 긴장을 종식시키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힌덴부르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가의 통제권을 군대에 넘길 것이었다. 나치 정권을 폐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독일 유일의 인물인 힌덴부르크의 계엄령 선포 위협은 히틀러에게 행동을 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히틀러는 뢰름을 제거하고 오랜 숙적들과 결판을 내야 할 때라고 결정했다. 힘러와 괴링 모두 뢰름의 몰락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결정을 환영했다. 힘러에게는 SS의 독립성, 괴링에게는 라이벌의 제거였다.

1930년 8월, SA 최고 지도자 프란츠 퍄퍼 폰 잘로몬은 1930년 9월 4일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 후보 명단에 돌격대원을 더 추가하라고 히틀러에게 요구하며 갈등을 깊게 했다. 결국 잘로몬은 1930년 8월 12일에 사임했다. 더욱이, 베를린 동부 지역 돌격대 부사령관 발터 슈텐네스가 당 지도부에 반란을 일으키는 등 돌격대를 둘러싼 상황은 불안해졌다.
히틀러 자신이 SA 최고 지도자에 취임했지만, 즉시 볼리비아에 있는 룀과 연락을 취해 직책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룀은 승낙했고, 1930년 11월 1일에 독일에 귀국하여 나치당에 재입당했다(당원 번호 41). 그리고 1931년 1월 5일에 공식적으로 돌격대 참모장에 취임했다. 룀은 대원이 반란을 일으켜도 즉시 진압할 수 있도록 1931년 봄에 돌격대의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는 조직 개혁을 실시했다.[5][6]
1931년 4월, 슈텐네스의 재반란으로 그의 일파 1만 명이 당과 돌격대를 떠났다.[7] 그러나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사회에는 실업자가 넘쳐났고, 그들은 반자본주의적인 정치적 급진파가 되어 나치당과 돌격대에 속속 가입했다. 1930년 7만 명이었던 돌격대 대원 수는 1931년 말에는 17만 명, 정권 장악 직전에는 70만 명에 달했다.[8][9] 따라서 돌격대는 더욱 과격해졌고, 대원들은 히틀러의 “합법적인 노선”에 염증을 느껴 무장 봉기를 요구하게 되었다. 룀도 대원들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이러한 목소리를 대변하게 되었고, 1931년 말에는 히틀러에게 무장 봉기를 건의했다.[10]
돌격대원들의 거리 등에서의 폭력적인 활동이 증가했기 때문에, 1932년 4월 13일에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와 빌헬름 그라이너 내무장관의 건의에 따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돌격대와 친위대의 활동 금지 명령을 내렸다.[11] 5월 8일에 히틀러와 룀은 나치당 탄압 명령에 반대했던 대통령 측근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과 만나 브뤼닝과 그라이너의 실각 공작에 대해 논의했다.[12] 슐라이허와 나치당은 5월 13일에 그라이너를 사퇴시켰고, 이어 5월 30일에는 브뤼닝 내각을 총사퇴로 몰아넣었다.[13] 그 후, 슐라이허의 추천으로 총리에 취임한 프란츠 폰 파펜은 6월 16일에 금지령을 해제했다.[14]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내각이 발족했지만, 국군에 대한 배려 때문인지 룀에게는 각료직이 주어지지 않았다.
1933년 3월 5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치당은 44.1%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연립 여당인 국가인민당과 함께 과반수를 확보했다. 나치당 정권은 각 주에 대한 개입을 시작했다.
하지만 바이에른 주 총리 하인리히 헬트는 나치당의 개입에 저항했다. 그 때문에 3월 9일 룀은 폰 에프와 바그너, 힘러 등과 함께 헬트 정권의 해체에 나섰다.[16][17] 다음 날인 3월 10일, 바이에른 주의 국가 위임관이 된 폰 에프에 의해 룀은 주 위원으로 임명되었다.[18][19]
룀은 3월 12일, 바이에른의 7개 군 지사청에 치안 유지와 정적 제거를 책임지는 "돌격대 최고 지도부 특별 위원회"를 설치하고, 그들의 지휘 아래 돌격대원들을 보조 경찰관으로 채용했다.[20] 룀은 이 제도를 다른 주에도 도입하려고 시도했고, 5월에는 프로이센 주에서 도입되었고, 그 후 다른 주들도 속속 도입했다. 돌격대원들은 보조 경찰관으로서 독일 전역에서 정적들을 예방 구금했다.[21]
하지만 히틀러와 내무장관 빌헬름 프릭 그리고 프로이센 주 총리 겸 내무장관 헤르만 괴링 모두 돌격대에 경찰 권한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괴링은 1933년 8월 보조 경찰대의 해산을 명령했고, 다른 주들도 속속 괴링을 따라 보조 경찰대를 해산시켰다. 극히 일부 돌격대원들이 정규 경찰관으로 채용되었지만, 대다수의 돌격대원들은 보조 경찰관으로 받던 급여를 끊기고 실직했다. 그로 인해 돌격대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공공연하게 "제2혁명"을 외치며 1933년 8월 이후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22]
돌격대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룀도 이에 동조하여 히틀러의 혁명 종식 선언에 저항했다. 룀은 9월 1일 바이에른의 돌격대 최고 지도부 특별 위원회 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바이에른 주 정부에 돌격대 특별 전권관, 군 정부에 돌격대 특별 위임관을 두었다. 그들의 임무는 "국가 사회주의 혁명에 의한 발전이 계속되고 있는지를 관청과 협력하여 감시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지방 행정 기관을 제2혁명으로 움직이려고 했던 것이다. 10월에는 괴링이 지배하는 프로이센 주에도 돌격대 특별 전권관의 설치를 허용하게 했다. 각 주들도 프로이센 주를 따라 돌격대 특별 전권관의 설치를 허용했다. 결과적으로 돌격대 특별 전권관에 의한 행정 간섭과 명령 불복종이 만연했고, 히틀러 정권은 조만간 붕괴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23]

히틀러는 돌격대 특별 전권관과 주 정부를 조금이라도 통합하기 위해, 1933년 12월 1일 당과 국가의 통일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고, 룀을 무임소장관으로 임명했다.[24][25][26] 괴링은 12월 15일 "프로이센 주 시정촌 제도법"을 도입하여, 시정촌 지방 평의회 구성원을 25세 이상으로 제한함으로써, 대부분을 젊은이들이 차지하는 돌격대원들을 프로이센의 지방 자치에서 배제했다.[27][28]

국제 연맹 탈퇴로 인해 폴란드와 프랑스가 침공해 올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독일에서 고조되고 재군비 문제가 주목받기 시작하자, 룀은 1934년 1월 15일 돌격대 특별 전권관의 임무를 "반국가적 음모와의 투쟁"으로 제한하는 등 제2혁명 문제에서 일정 부분 양보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대신 재군비 문제와 관련하여 돌격대를 독일 정규군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본격적으로 품기 시작했다. 돌격대를 정규군으로 만들면 대원들의 실업 문제가 크게 개선되고 혁명을 일으킬 필요가 없어지므로, 룀은 제2혁명보다 돌격대 정규군화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29]
룀의 군사적 야심은 정규군인 국군과 마찰을 빚었다.[30] 그는 귀족들이 간부를 차지하고 있는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군으로서는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군비를 한다 해도 결국 구 프로이센 왕국적인 구식 군대에 지나지 않고, 근대전에 대응할 수 있는 군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룀이 이상으로 삼았던 것은 국민군의 형태였다.[31] 돌격대는 5개의 돌격대상급집단(군대의 “군단”에 상당)과 18개의 돌격대집단(“사단”에 상당)으로 구성되어 국군의 5배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하고, 군대와 동등한 규율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지휘관들은 전직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언제든지 국군을 대체할 수 있는 상태였다.[32]
국군과 돌격대는 1933년 5월에 협정을 맺었고, 돌격대와 친위대, 철모단은 국방성의 관할에 들어가게 되었다. 국군으로부터도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프리드리히 빌헬름 크뤼거 돌격대 대장 휘하에서 돌격대원의 훈련이 이루어졌고, 국군에 보내졌다. 그러나 룀은 곧 동부 국경 수비대의 지휘권을 요구하고, 또 그 무기고를 관리하에 두려고 하면서 국군과의 대립을 심화시켰다.[33]
한편 히틀러는 국군을 가지고 재군비를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룀의 국민군 구상을 단호히 거부했다.[34] 1934년 2월 28일에는 히틀러가 참석한 가운데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국방장관 이하 국방성 간부와 룀 이하 돌격대 간부가 회담을 가졌다. 히틀러의 바람으로 양측은 국군이 독일 유일의 국방 병력임을 인정하고, 돌격대는 준군사 조직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며, 국군 입대자에 대한 훈련 등을 주요 임무로 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회담 후 룀은 “저 천박한 하사관의 말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이런 협정을 전혀 지킬 생각이 없다! 히틀러 같은 배신자는 몰아내야 한다. 그를 제거한 후 우리가 권력을 장악할 것이다!”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35][36][37]
5. 3. 히틀러의 견제와 SA의 무장력 증대
룀과 돌격대(SA)는 자신들을 "국가 사회주의 혁명"의 선봉대로 여겼다. 히틀러가 국가 권력을 장악한 후, 이들은 독일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총리가 된 히틀러에게 돌격대의 거리 싸움 능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나치당 내에서 룀은 사회주의적 분파의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적인(Sozialistische)", "노동자(Arbeiter)"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이들은 유대인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산업 국유화와 노동자 지배를 선호했으며, 제국 시절 귀족들의 자산을 몰수하여 재분배하기를 원했다. 룀은 "반동세력"에 맞서 "제2의 혁명"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히틀러의 집권을 도운 자본가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히틀러는 자본가들에게 "제2의 혁명"은 없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돌격대원 대부분은 노동계급 출신으로 사회주의적 정책을 원했다. 이들은 사회주의 정책을 실행하지 않고, 집권에 공이 큰 돌격대에 보답하지 않는 히틀러에게 실망했다. 룀은 공개적으로 "제2의 혁명"을 수행하지 않는 히틀러를 비판하기도 했다.
더욱이 룀과 돌격대 지휘관들은 300만에 달하는 돌격대를 독일 국방군(당시 이름은 Reichswehr)을 대체하여 새로운 독일 정규군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룀은 국방장관이 되기를 원했고, 1934년에는 독일 국방군을 돌격대에 합병하여 "진정한 인민의 군대"를 구성하려고 하였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의 역사를 가진 독일 국방군 지휘부를 경악케 했다. 독일 국방군은 돌격대를 거리에서 싸움질이나 하는 오합지졸로 간주했고, 돌격대 지휘부의 동성애적 성향을 혐오했다. 돌격대와 독일 국방군의 갈등은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히틀러는 룀과 마찬가지로 독일 국방군 지도부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었으나, 권력의 안정화를 위해 군부의 지지를 필요로 했다. 또한 당시 86세의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군부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군부를 안심시키기 위해 히틀러는 돌격대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룀은 히틀러에게 강하게 항의했고, 돌격대의 무장력을 증대시키기 시작했다. 군부와 돌격대의 긴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1934년 3월 룀은 돌격대 지도부가 국방군에 편입되는 타협안을 내놓았으나, 군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1934년 4월 11일, 히틀러는 군부 고위직들과 만나 힌덴부르크 사망 후의 방안을 논의했다. 히틀러는 군부가 자신의 대통령직 승계를 지지한다면, 돌격대를 축소하고, 룀의 야망에 재갈을 물려, 국방군이 독일의 유일한 무장조직이 된다는 것을 보장했다. 또한 히틀러는 군비를 확장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독일 국방군과 자본가들은 힌덴부르크에게 돌격대에 대해 계속 불평하였다. 1934년 6월,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히틀러에게, 돌격대와 군부의 긴장이 해소되지 않으면, 힌덴부르크가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최후통첩을 재확인했고, 이것은 히틀러의 축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룀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6. 제거 음모와 장검의 밤 사건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국방장관은 1934년 6월 21일 돌격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히틀러의 권한을 육군에 이양하겠다고 통보했다. 힌덴부르크의 병세 악화로 그의 죽음이 가까워지자, 히틀러는 군의 충성을 얻기 위해 룀을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다.[43][44]
1934년 6월 28일, 히틀러는 룀에게 6월 30일에 바트비제의 “쿠어하임・한젤바우어”에서 회의를 열 것이라고 지시했다. 룀 등은 의심 없이 소집에 응했다.[45][46][47]
1934년 6월 30일 오전 6시 30분경, 히틀러는 친위대원들을 이끌고 클럽하우스에 침입, 룀에게 권총을 겨누며 체포했다.[48] 룀은 반역을 부정했지만 뮌헨의 Justizvollzugsanstalt Münchende로 이송되었다.
히틀러는 룀에게 자살 기회를 주었으나, 룀은 "아돌프가 직접 하라"며 거절, 테오도르 아이케와 미하엘 리퍼트에게 사살당했다.[52][53]
6. 1. 제거 음모
히틀러는 오랜 동지인 에른스트 룀을 제거할 결심을 했지만, 실행은 미루고 있었다.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 요제프 괴벨스 등 나치당 내 권력 투쟁의 중심 인물들은 룀의 반대파였다. 룀을 고립시키기 위해 괴링은 게슈타포를 힘러 휘하로 옮겼다. 이들은 룀의 반(反)히틀러적 언행을 모아 SA의 반역 혐의를 입증할 증거로 사용했다.힘러와 그의 부하인 SS보안대(SD) 사령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룀이 프랑스로부터 를 받아 6월 24일 SA를 동원해 히틀러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증거를 조작했다. 이 정보는 히틀러에게 전달되었고, 히틀러는 미뤄왔던 룀 제거를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괴링, 힘러, 하이드리히 등은 제거 대상자들의 이름을 나열한 "살생부"를 작성했고, SS에 동원 명령을 내렸다. SS장교인 요제프 디트리히 등은 국방군 지휘부에 살생부 명단을 보여주며 군부를 안심시켰다.
한편, 룀과 동료들은 휴가를 떠나 바트비제의 한 휴양지에 있었다. 6월 28일, 히틀러는 룀에게 전화를 걸어 6월 30일에 SA 지휘관들을 모두 바트비제에 소집하라고 요구했고, 룀은 의심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45][46][47]
1934년 6월 30일, 히틀러와 다수의 SS 및 일반 경찰은 뮌헨으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여 오전 6시에서 7시 사이에 룀과 그의 추종자들이 머물고 있던 바트 비스제의 한젤바우어 호텔에 도착했다.[45][46][47] 히틀러는 직접 룀과 다른 고위 SA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히틀러는 룀이 정권을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지만, SA 지도부를 비난했다. 뮌헨의 당 본부로 돌아온 히틀러는 모인 군중에게 연설했다. 분노에 휩싸인 히틀러는 "세계 역사상 최악의 배신 행위"를 비난하며, "규율 없고 불복종적인 인물들과 반사회적이거나 병든 요소들"이 전멸될 것이라고 말했다.[49]
국방군 군무국장 발터 폰 라이헨나우 소장과 친위대 SD 사령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돌격대 제거를 위해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하이드리히는 룀과 그의 일당 전원의 말살을 결의하고,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를 설득하여 룀의 숙청을 결의하게 했다. 친위대는 프로이센 주총리 헤르만 괴링과 연계하여 룀 말살 계획을 진행했다.[38][39]
6. 2. 장검의 밤 사건
6월 30일, "장검(長劍)의 밤"으로 불리는 날, 아돌프 히틀러는 뮌헨을 거쳐 바트비제에 도착했다.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가 지휘하는 SS 병력을 동원하여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SA 지휘관들을 체포했다. 이들은 뮌헨의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나치의 다른 반대자들도 함께 수감되었다.[49]히틀러는 오랜 동지였던 룀을 처형하는 것을 망설였고, 룀에게 자살할 기회를 주었다.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SS 장교 테오도르 아이케와 미하엘 리퍼트는 룀이 갇혀 있는 감옥을 찾아가 권총을 테이블 위에 놓고 10분 안에 자결하라고 요구했다.
룀은 "만약 내가 처형되어야 한다면, 아돌프가 직접 하라고 해!"라며 거절했다. 10분이 지나 아이케와 리퍼트가 돌아왔을 때, 룀은 마치 쏴보라는 듯이 앞가슴을 내놓고 서 있었다. 결국 이들은 룀을 사살했고,[52][53] 시신은 뮌헨의 한 공동묘지에 묻혔다.
SA 숙청의 이유가 된 "반란음모"는 바로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은 비행이나 변태행위 혐의로 처단되었다는 암시만 있었을 뿐이었다. 며칠 후, 룀과 SA 지도부가 연루된 "SA의 반역행위"가 발표되었다.
6. 3. 숙청의 결과와 영향
1934년 6월 30일, 룀의 처단이 실행된 날은 "장검의 밤"으로 불린다. 히틀러는 SS 병력을 동원하여 룀과 다른 SA 지휘관들을 체포했다. 룀은 히틀러의 오랜 동지였지만, 히틀러는 룀에게 자살할 기회를 주었다. 테오도르 아이케와 미하엘 리퍼르트는 룀에게 권총을 주며 자결을 요구했지만, 룀은 "내가 처형되어야 한다면, 아돌프가 직접 하라고 해!"라며 거절했다. 결국 이들은 룀을 사살했고, 시신은 뮌헨의 한 공동묘지에 묻혔다.[52][53]SA 숙청의 공식적인 이유는 "반란 음모"였지만, 실제로는 비행이나 변태 행위 혐의로 처단되었다는 암시가 있었다. 며칠 후, 룀과 SA 지도부가 연루된 "SA의 반역 행위"가 발표되었다.
이 숙청으로 150명에서 200명, 또는 그 이상의 돌격대 간부, 당의 정적, 반(反)히틀러 분자 등이 체포되어 법적 절차 없이 처형되었다.[53] 여기에는 구스타프 폰 카알 전 바이에른 주 총독, 나치 좌파의 전 지도자 그레고어 슈트라서, 육군 중장 쿠르트 폰 슐라이허 전 총리 등이 포함된다. 이 사건으로 친위대의 초법적 조치의 전례가 생겼고, 국군은 나치의 강경책에 전율하면서도 위협이 사라진 것을 평가하여 이후 완전한 협력을 약속하게 되었다. 시민들은 돌격대의 숙청에 냉담했으며, 언론은 대체로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7. 룀의 유산과 평가
에른스트 룀은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히틀러는 초기에는 이를 묵인했다.[57] 룀은 뛰어난 조직력과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인물로 알려졌지만, 무자비하고 파렴치한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기 전까지 히틀러에게 정치적으로 유용했다.
1934년 6월, 장검의 밤으로 알려진 대숙청 과정에서 룀은 숙청되었다.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룀이 프랑스 정부로부터 를 받고 히틀러를 타도하려 했다는 허위 증거를 조작했다.[54] 숙청 이후, 나치는 룀의 동성애를 비난하며 숙청을 정당화했다.[58]
1934년 7월 3일, '국가 자위 조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숙청이 합법화되었다.[54] 룀을 독일 역사에서 지우려는 시도로, 그가 출연한 선전 영화 "믿음의 승리"의 거의 모든 사본이 파괴되었으나, 한 개의 사본은 살아남았다.[54]
룀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코의 절반이 없고 뺨에 관통상의 흔적이 있어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54] 그는 히틀러와 'Du'로 서로를 부르는 친밀한 관계였으며, 이는 고참 당 간부 중에서도 룀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다.[55] 룀은 공공연한 동성애자였으며, 형법 175조 폐지를 주장했다.[57] 긴 칼의 밤 이후, SS에 의해 동성애자 탄압이 강화되었다.[5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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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ler. Eine Biographie
Ullstein 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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